가을 들녘 황금빛 절경 '귤림추색' 1200년대부터 시작
가을 들녘 황금빛 절경 '귤림추색' 1200년대부터 시작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2.2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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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10>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9)
현존 제주의 동정귤-광령귤나무. <고정군 제주도세계자연유산본부 과장 제공>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는 13세기 전반부터 이미 ‘귤의 고장’으로도 일컬어졌음이 드러난다. 이렇게 된 데는 감귤류 품종의 다양화와 함께, 감귤의 수요·공급도 늘어났기 때문이라 하겠다.

제주 사람은 ‘동정귤’도 1260년 이전부터 재배했다고 보이나, 가장 먼저 재배가 확인되는 감귤 품종은 ‘청귤(靑橘)’이다.

최자(崔滋)가 1234년(고종 21) 제주수령을 지내는 동안 매해 감귤을 이규보(李奎報)에게 보냈다. 이때의 품종이 청귤이었다. 청귤의 경우는 1520년 이전 무렵 제주 감귤 가운데 최상급으로 치는 사람도 꽤 있었던 품종이기도 하다.

그 이유로는 달고, 신맛이 적절히 섞여 있었던 점을 들곤 했다고 한다.

‘등(橙)’은 작고 아주 시큼한, 곧 신귤(sour orange)로도 일컫는 품종이다. 등도 13세기 중반 이전부터 제주에서 재배됐음이 확인된다. 이 사실도 이규보의 시에서 엿보인다.

유홍개(庾弘盖)가 1240년 경 제주수령으로 떠날 때 이수(李需)란 문사(文士)가 전별의 시를 썼다. 이규보도 이와 관련해 시를 지었다. 여기에 이규보가 유홍개를 향해 ‘橘·橙(귤·등)’의 땅에 들어간다고 말한 뒤, “함께 제주로 뛰어가서(중략) 입맛을 돋우기 위해 등도 나눠먹고 보세나”란 내용도 나온다.

이를 보면 등은 이미 에피타이저(appetizer), 곧 식욕을 돋우는데 뛰어난 약리적 식품으로 활용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한편 김구(金坵)가 1234~ 1239년(고종 21~26) 무렵 제주판관으로 왔었다. 이때 그는 제주 사람에게 밭 돌담을 처음 쌓게 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가 제주에 펼친 시정의 인사고과와 관련해서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에 의하면, “遺愛深橘柚之鄕(유애심귤유지향)”, 곧 ‘귤의 고장에 애정을 깊게 남겨놓았다’란 평가를 받았다. ‘유자(柚子)’도 13세기 전반 이전부터 제주에서 재배됐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 때 제주 재배의 감귤류 나무는 청귤, 등, 유자, 동정귤이란 4가지 품종 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주는 김구가 제주판관으로 왔었던 13세기 전반부터 이미 ‘귤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제주가 귤의 고장으로 일컬어진 데는 감귤의 수요 확대도 빼놓을 수 없다. 제주는 1052년 이전부터 매해 일정량의 귤을 상납했다. 그런 만큼, 제주 감귤이 개경 궁궐에서도 유통됐다. 그래서 태자가 총애하는 여종이 궁의 담 안에서 귤을 밖으로 던지고는, 1189년(명종 19) 수상도 지낸 최세보의 아들을 유혹하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이후 둘은 사통하게 됐다. 훗날 일이 발각되자, 태자가 여종을 쫓아내 비구니가 되게 했고, 최세보의 아들은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팔관회(八關會)는 고려 때 최고·최대의 불교적 국가의식이자 명절이었다. 이를 기리는 상 위의 공양물로는 귤과 유자도 올렸음이 확인된다.

특히 감귤류 나무의 열매가 약초로서도 뛰어나고, 거래가 활발하다는 점은 제주 사람의 감귤재배 확산에 더욱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제주지역은 1260년 이전의 남송(南宋) 시대부터 중국 화남 지역의 국제무역상이 중간 기착지로 삼고 수시로 찾아왔었던 곳이다.

또한 이들 상인은 당시 중국에서 감귤류 열매의 약초로서 가장 명성이 높은 ‘진피’를 선적해 동아시아지역의 국제적 유통에도 나서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제주 사람도 13세기 중반 이전부터 감귤류 나무의 열매가 지닌 약리적 효능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이후 감귤재배에도 한층 더 다가서게 됐다고 하겠다.

하여튼, 조선시대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깊은 겨울 귤과 유자가 서리를 맞아 지붕에 매달려 있다.(중략) 향기가 발에 스며드니 귤이 있는 것을 알겠다’고 제주지역의 경관을 읊은 문구가 나오고 있다. 또한 19세기 중반 제주 출신의 유학자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 1823~1881)가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곳을 가려 ‘영주10경(瀛洲十景)’이라 하고 한시(漢詩)를 읊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귤림추색(橘林秋色)’이다. 그 내용은 가을 들녘에 감귤이 노란 황금빛으로 익는 제주 절경을 노래한 것이기도 하다.

제주는 800여 년 동안 ‘귤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었던 것이다. 그답게 제주 경관에 감귤류 품종의 나무가 얹힌 것은 1200년대 전반부터 이미 시작됐음이 확인된다. 이후 감귤나무 조경의 제주 경관이 점차적으로 확산돼 나아갔던 한편, 그 경관이 제주에서는 가장 빼어난 10곳의 절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데 이르게 됐던 것이다.

(좌) ‘영주십경’ 관련 소암 현중화의 서예 작품 10폭 병풍 가운데 ‘귤림추색’ 부분(소장 김일우), (우) 귤림풍악(탐라순력도 수록 화폭)-귤림에서 풍악을 울리며 노는 장면을 그린 것.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감귤품종 명칭의 유래와 온주밀감-“‘사쯔마’는 원저우서 왔다?…오해”

감귤의 각 품종은 그만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이들 이름의 유래는 각각의 원산지, 혹은 도입지의 지명에서 온 것이 많다.

동정귤은 둥팅산(洞庭山), 복귤은 푸저우(福州), 유귤(乳橘 C. kinokuni)은 일본 키노쿠니(紀國), 온주밀감은 원저우(溫州)에서 처음 났거나, 혹은 건너왔기에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12세기 후반 한옌즈(韓彦直)는 “원저우 사람들은 그 곳에 있는, 진흙산이라는 섬에서 산출된 우유처럼 맛있는 유감(乳柑)을 진감(眞柑)이라 하며 최고로 쳤다”고 말했다. 원저우의 옛 이름은 ‘구월(甌越)’ 혹은 ‘동구(東甌)’라고 일컬었다. 유감도 원산지의 지명을 따 구감(甌柑 C. suavissima)이란 이름도 붙여졌다. 유감의 ‘C. suavissima’란 학명도 ‘溫(부드러운)’을 뜻하는 라틴어 ‘suavis’ 와 섬(島)을 뜻하는 ‘sima’ 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감귤품종의 이름과 그 유래처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는 종종 ‘사쯔마 만다린(Satsuma mandarin)’을 원저우에서 왔다고 하는 것이다. 원저우에서는 사쯔마의 유사품종이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옛날 원저우에서 일본으로 도입된 품종이 우연히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본다. 사쯔마의 학명은 ‘Citrus unshiu Marcovitch’이다. ‘사쯔마’라는 명칭은 큐슈(九州)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 있던 사쯔마(薩摩)라는 나라에서 유래했고, 이곳에서 나는 감귤인지라 ‘사쯔마’라 했던 것이다. 반면, 그 학명에는 온주(unshiu)란 표기도 있는 터이라 원저우에서 도입됐던 것으로 얘기를 하곤 했다. 이로써 사쯔마는 온주밀감으로 일컫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애초 온주계(系) 감귤이 1966년부터 중국으로 들어가 대량으로 재배됐다. 이어 이들이 중국 토종 구감과 혼용돼 유통됨으로 ‘사쯔마’를 원저우에서 유래한 감귤로 보는 혼동을 더욱 부채질 했다고 하겠다.

제주 재래감귤의 경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외부에서 도입됐을 것이다. 지금 제주에는 소수의 제주 재래감귤과 일본에서 도입된 온주계 감귤과 교잡종이 대량으로 재배되고 있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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