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건배사, 그러나
멋진 건배사, 그러나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9.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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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수필가/하귀일초등학교장

[제주일보] 지난 8월 제주 PEN클럽이 연변시인협회와의 문학교류 행사를 연변에서 개최했다. 그 날은 일송정, 윤동주의 생가와 묘지, 대성중학교 등을 둘러본 날이라 하루가 짧았다. 행사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하자 연변시인들이 반갑게 맞는다. ‘섬과 대륙을 잇는 문학의 바람’이라는 현수막이 제주의 문학과 연변문학의 소통의 장임을 알려준다. 제주에서 만들어간 ‘섬과 대륙을 잇는 문학의 바람’이라는 공동 작품집을 보면서 낯설음을 익혀갔다.

서로가 문학인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서인지 쉽게 대화가 트였다. 특강에 이어 서로의 작품을 낭송하며 문학의 향기에 취했다. 이어서 만찬의 시간이 되고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여종업원 셋이 악기를 연주하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나니 독한 중국술과 제주에서 가져온 ‘한라산’ 소주가 넘나들었다.

술이 있는 자리에는 건배사가 있게 마련이다. 몇몇 사람이 건배사를 했는데 기억에 남는 건배사가 있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연변에서 문예평론가로 활동하시는 최선생님(79)이 하신 건배사다. “문학과 술이 있으면 천국이다. 거기에 여자가 있으면 지옥도 천당이다”라고 외쳤다. 그 말이 끝나자 술잔들은 마치 천당에라도 온 듯이 한바탕 웃음과 뒤섞이더니 곧 빈 잔으로 선다. 필자도 웃으며 술잔을 비우는 순간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문학과 술이 있으면 천국이다’라고만 했으면 정말 멋진 건배사가 되었을 텐데 하필 여자를 끼워 넣어서 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그 자리가 천국처럼 즐거운 자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씀했겠지만 필자가 듣기엔 거북스러웠다. 여자가 남자들에는 아직도 도구로서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연변은 한국에 비해 아직도 성차별이 더 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필자에게도 건배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순간 묘한 복수심(?)같은 것이 발동하였다. 조금 전 건배사에 화답을 한다면서 “문학과 술과 남자가 있으면 지옥도 천당이다”라고 했더니 또 한 번 술잔이 웃음과 함께 흔들린다. 짧은 생각에 되갚음으로 그렇게 말은 했지만 똑같은 사람이 된 것 같아 곧 후회했다. 그 자리에서 필자의 마음을 헤아린 사람이 몇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젠더 감수성이 높은 분들은 이해를 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분들은 그냥 웃으라고 한 소리로 들었을 수도 있다.

‘젠더 감수성’이라는 말은 성, 성역할 때문에 발생하는 남녀의 차별, 비하, 폭력 등을 당연시하거나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이를 감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제주에 돌아와서 사석에서 동행했던 분과 그 건배사 이야기를 했더니 양성평등의 관점에서는 부적절한 건배사였다고 필자의 생각에 동의했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다르지만 차별되는 존재는 아니다. 똑같이 신이 창조한 인간이기에 우리사회에서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동반자다. 오랜 타성이라는 이유로 무감각하게 행해지는 차별들은 누군가 이야기를 해주면서 바꾸어 나갈 책임이 있다.

그 날의 건배사 중 앞부분 ‘문학과 술이 있으면 천국이다’라는 말은 아직도 멋진 건배사라고 생각한다. 다만 뒷부분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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