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부끼는 억새, 울긋불긋한 꽃과 잎…참 호사스런 길"
"나부끼는 억새, 울긋불긋한 꽃과 잎…참 호사스런 길"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10.2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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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제14코스(저지~한림올레)-저지마을~월령마을(10.5㎞)
무명천 산책길

[제주일보]# 10월 중산간 마을 풍경

제21호 태풍 ‘란’이 일본 쪽으로 비켜간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번 코스는 중산간 숲길을 포함한 곳이라 그 때가 가까워지면 비라도 와서 질척거리지 않을까 해, 좀 늦은 시간에 저지리에 도착해 14코스 들머리에 선다.

저지오름 동쪽 기슭을 비껴가는 농로다. 주변은 온통 감귤 과원이 들어서고, 대부분의 열매가 노랗게 물들어간다.

농지가 비교적 넓은 저지마을은 과거엔 돈이 되는 작물로 맥주보리를 많이 재배했는데, 지금은 과수원을 제외한 곳엔 콩과 야채다. 콩이 돈이 되는지 가는 곳마다 콩밭이고, 사람이 보이는 곳 역시 콩밭이 유일하다.

과수원 울타리에 호박이 누렇게 익어 불룩불룩 튀어나온 갑이 선명하니 눈길을 끈다. 저걸 다박다박 썰어놓고 싱싱한 갈치 몇 토막 넣어 국을 끓이면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얼갈이배추를 좀 넣어도 좋겠지.

 

# 오시록헌 농로에서 굴렁진 숲길까지

큰소낭 숲길을 지나 ‘오시록헌 농로’로 들어선다. 제주어 ‘오시록허다’는 ‘둘레가 잘 가려져 드러나지 않아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있다’라 풀이 돼 있다. ‘오시록헌디 꿩독새기 난다’로 잘 알려진 말이다. 그 길이 오시록해서 길을 낼 당시 제주올레 측에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오래 농사를 짓지 않아 억새가 가득한 밭을 지나 무심코 나아가는데, “양~!”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았더니 콩을 꺾던 아저씨가 “올레길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 알려준다. 헛걸음할 뻔 했는데 고마워서 “막 고맙수다!”를 외치며 잣질로 들어섰다. 잣질은 돌무더기 울타리를 따라 꼬불꼬불 잘도 만들었다. 잣질이 끊기면 이번에는 자왈길이다. 찔레나무와 꾸지뽕나무 같은 가시덤불이 이어진다. 이런 험한 곳에 길을 내고 가시를 베어, 돌아서면 다시 무성해진다. 올레길 관리를 참 잘 하고 있다. 새삼 감사를 느낀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꽃과 새와 사람이 함께 사는 한림읍’ 간판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곳이 월림리일 터. 간판 속의 말 ‘간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옮긴다. 물탱크가 여럿 보이고 양배추와 콜라비가 많이도 자랐다.

여유를 가지고 농로를 따라 걷다보니, ‘굴렁진 숲길’이 나타난다.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에 나무 사다리 발판이 놓였다. 여기도 곶자왈 같은데, 종가시나무가 유달리 많다. 지락지락 열린 도토리들이 제법 실하다.

 

무명천 할머니 초상

# 무명천 산책길

‘무명천 산책길’이라 해서 나는 무명천을 두르고 살았던 ‘진아영 할머니’를 떠올렸다.

들른 지가 꽤 오래 돼 이번 올레길에서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다. 그러나 ‘거기는 선인장 마을 월령리인데’하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곳은 이름이 없는(無名) 내(川)다.

설명을 담은 안내판이라도 세워줬으면 고마울 텐데. 금악 서북쪽에서 시작돼 월령리 서쪽 바닷가에 이르는 꽤 긴 내인데, 아직도 이름이 없는 것이다.

‘산책길’이라 이름 했듯 진짜 평탄하고 좋은 길이다. 잘 정비된 냇가를 따라 다리를 동서로 반복해 건너면서 일주도로까지 이어진다.

잔디나 풀이 깔린 길인데, 억새가 나부끼기도 하고 가을로 가는 온갖 꽃과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물들어 계절을 느끼게 한다. 때마침 상동나무도 작은 꽃을 피워 달달한 향기를 풍긴다. 이보다 호사스런 올레길이 더 있을까 보냐. 주변에 선인장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월림을 지나 월령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선인장 자생지

# 월령리 선인장 자생지

월령리에 가까워지면서 선인장을 재배하는 밭이 많다. 열매가 익어 딸 때가 됐다. 우리가 어렸을 적 주변에서 보아왔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20~30년 전후로 생각된다. 화단에 두어 포기 심었다가 화상을 입거나 타박상이 생기면 얇게 반으로 갈라 붙였다.

그런데 이게 바다에 떠돌다 이곳 월령리에 정착해 번식하고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해가 안 갔다. 바다에 떠돌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절여지지 않나 하는 의심에서다.

안내문에는 ‘월령리의 선인장은 관상용으로 재배되고 있는 선인장류 중 국내의 유일한 자생종이다. 선인장이 이곳에 자라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해류(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이곳에 밀려와 모래땅이나 바위틈에 기탁한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했다. 사막에 자생하는 거라 건조한 날씨와 척박한 땅에서 자라서 그런지, 열매는 ‘백년초’라 해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고소득 작물이라 썼다.

 

# 무명천 할머니

오랜만에 무명천 할머니 집을 찾았다. 마을 곳곳에 할머니 집을 안내하는 표지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진아영 할머니는 제주 4․3 당시인 1949년 1월 12일 한경면 판포리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잃고 무명천으로 싸매, 정상적으로 말을 하거나 먹지 못한 채 소화불량, 관절염 등 후유장애를 앓다가 2004년 9월 8일 향년 90세로 생을 마감하신 분이다.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중략)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허영선 시 ‘무명천 할머니-월령리 진아영’ 부분.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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